출발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플랫폼이 뒤로 물러나고, 익숙한 풍경이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간다. 서울역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KTX. 두 시간 반의 여정이 시작된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다. 창가 자리다. 일부러 창가를 예약했다. 기차 여행의 묘미는 창밖 풍경에 있으니까. 짐을 선반에 올리고, 편한 자세로 앉는다.
창밖을 바라본다. 빌딩들이 점점 작아지고, 어느새 들판이 펼쳐진다. 하늘은 넓고, 구름은 느리게 흘러간다. 오전 열 시의 햇살이 차창으로 쏟아진다. 따뜻하다.
옆자리에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다. 노트북을 꺼내 뭔가 작업을 시작한다. 맞은편에는 젊은 커플. 이어폰을 나눠 끼고 영화를 보는 듯하다. 각자의 이유로 이 기차를 탔을 것이다. 일 때문에, 여행 때문에, 혹은 누군가를 만나러.
차창 밖 세상
기차 여행의 매력은 이 느린 속도에 있다. 비행기처럼 빠르지도, 차처럼 제어할 수도 없다.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갈 뿐.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고, 빨리 가고 싶어도 빠르게 갈 수 없다. 그냥 기차의 속도에 맡기는 것. 그것이 기차 여행이다.
작은 마을을 지나간다. 누군가의 일상이 스쳐 지나간다. 빨래를 널고 있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아이, 산책하는 개.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의 삶을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보고, 지나친다. 그들은 내가 탄 기차를 보고, 어디로 가는 기차일까, 잠깐 생각할지도 모른다.
논이 보인다. 초록색 벼가 바람에 일렁인다. 물결처럼. 아직 수확하기 전이다. 한 달쯤 후면 황금빛으로 물들겠지. 그때 다시 이 기차를 타면,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같은 길이지만,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터널에 들어간다.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터널을 나오니 강이 보인다. 넓고 느긋하게 흐르는 강. 다리를 건넌다. 창밖으로 강물이 햇빛에 반짝인다. 누군가 낚시를 하고 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경.
시간의 흐름
손목시계를 본다. 출발한 지 40분.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았다. 긴 시간도 아니고, 짧은 시간도 아니다. 책을 읽기에는 좋은 시간.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요즘 읽고 있는 소설.
하지만 책을 펼치지 않는다. 그냥 창밖을 계속 보고 싶다. 책은 나중에 읽어도 된다. 하지만 이 풍경은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다. 같은 길을 지나가도, 계절이 다르고, 날씨가 다르고, 시간이 다르면 풍경도 다르다.
옆자리 여성이 전화를 받는다. 네, 곧 도착해요. 한 시간쯤 남았어요. 조용히 통화하고 끊는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다. 기차 안에서도 일을 하는 사람들. 바쁜 세상이다.
생각의 흐름
기차 안은 생각하기 좋은 공간이다. 할 일도, 해야 할 것도 없다. 물론 노트북을 꺼내 일할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오직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 시간을 보내면 된다. 어떻게 보내든 상관없다.
평소엔 미루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중요한 결정, 사소한 고민, 잊었던 기억들. 기차의 리듬에 맞춰 생각도 흘러간다. 끊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요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바쁘게만 살았던 것 같다. 하루하루 할 일에 쫓겨서.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씻고, 자고. 반복. 주말에도 밀린 일을 하거나, 쉬지도 제대로 못 쉬고.
이렇게 가끔은 멀리 떠나는 것도 좋다.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마음도 여유가 생긴다. 일상에서 벗어나면, 일상이 보인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부산에 도착하면 뭘 할까. 바다를 볼 것이다. 해운대든, 광안리든.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것이다. 횟집에서 회를 먹을 것이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고,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리고 또 걸을 것이다. 계획 없이, 그냥.
기차 안의 사람들
주변을 둘러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 가족 단위, 친구들, 연인들. 나이도 다양하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통로 건너편 좌석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신문을 읽고 계신다. 종이 신문. 요즘 보기 드문 광경이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데. 할아버지는 천천히, 한 줄 한 줄 읽으신다. 가끔 안경을 고쳐 쓰시며.
앞쪽에는 아이와 엄마가 있다. 아이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인다. 창밖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엄마, 저기 소 있어! 엄마가 웃으며 그러네, 하고 대답한다.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할 것이다. 처음 타보는 기차, 처음 보는 풍경.
나도 어렸을 때 그랬다. 기차를 타면 신났다. 창밖 풍경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 신기함이 사라졌다. 익숙해져서. 하지만 오늘은 다시 그 느낌이 조금 되살아난다. 오랜만에 타는 기차여서 그런가.
중간역 정차
기차가 속도를 줄인다. 대전역에 도착한다.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 짧은 정거장 시간. 2분.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서둘러 탄다. 곧 문이 닫히고, 다시 출발.
옆자리가 바뀌었다. 노트북 치던 여성이 내렸고, 젊은 남성이 앉았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듯하다. 고개를 까딱이며 리듬을 탄다. 창밖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있다. 각자 기차를 타는 방식이 다르다.
생각의 끝
다시 창밖을 본다. 도시가 보인다. 대전을 지나니 다시 시골 풍경. 그리고 또 도시. 이렇게 반복된다. 사람 사는 곳과 자연이 번갈아 나타난다.
기차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운전하지 않아도 되고, 길을 찾지 않아도 되고, 신경 쓸 것이 없다. 그저 앉아서 창밖을 보거나, 생각하거나, 책을 읽거나. 자유.
물론 비행기도 그렇다. 하지만 비행기는 너무 빠르다. 탔다 싶으면 도착한다. 그리고 구름 위를 날아서 지상이 보이지 않는다. 기차는 다르다. 땅 위를 달린다.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그 느린 속도가 좋다.
도착 전
안내 방송이 들린다. 곧 부산역에 도착한다고. 승객 여러분, 종점 부산역입니다. 내리실 손님께서는 미리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짐을 내리고, 옷을 챙기고, 출구 쪽으로 이동한다. 나도 가방을 챙긴다. 책은 결국 펼치지 않았다. 괜찮다. 오는 동안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부산이다. 파란 바다. 드디어 도착했다. 여행은 끝나가지만, 이 시간은 내 안에 남는다. 기차 여행이 주는 선물, 여유와 사색의 시간.
기차가 완전히 멈춘다.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내린다. 나도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플랫폼에 내리니 따뜻한 바람이 분다. 바다 냄새가 난다. 부산의 공기.
역 밖으로 나간다.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잠깐 고민하다가, 걷기로 한다. 호텔까지 20분 정도. 걸을 만하다. 그리고 걸으면서 이 도시를 느끼고 싶다. 서울과는 다른 공기, 다른 풍경.
가방을 끌며 걷기 시작한다. 기차에서 내렸지만, 여행은 계속된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