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와 함께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생각이 많아진다. 평소엔 그냥 지나쳤을 순간들이, 빗소리와 함께 천천히 되살아난다. 오늘도 그렇다. 오후 세시, 회색빛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모습을 바라본다. 각각의 물방울은 서로 다른 속도로,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아래로 흘러간다. 어떤 것은 곧장 내려가고, 어떤 것은 중간에 멈춰 서서 다른 물방울을 기다린다. 그렇게 만난 물방울들은 하나가 되어 더 빠르게 흘러내린다.
이 단순한 현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흐른다. 30분, 아니 한 시간쯤 되었을까. 차는 이미 식었지만 다시 데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고요함을 깨고 싶지 않다.
지나간 계절
작년 이맘때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그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고민을 안고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때도 지금처럼, 비 오는 날의 고요함 속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을 것 같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작년 이맘때 사진을 찾아본다. 정말 비가 왔었다. 젖은 도로, 우산을 쓴 사람들, 흐린 하늘. 사진 속 날짜는 정확히 1년 전 오늘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묘한 기분이 든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계절은 돌고 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이 습관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고요 속의 울림
빗소리는 모든 것을 부드럽게 감싼다. 거리의 소음도, 마음의 소란도 잠시 잊게 만든다. 차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음. 평소 같으면 신경 쓰였을 소리들이 빗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이런 순간이 주는 평화로움. 그것이 나를 계속 이 자리에 머물게 한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게 사치라면 사치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사치가 필요하다.
비는 언젠가 그칠 것이다. 하늘은 다시 맑아질 것이고, 일상은 계속될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바쁜 하루가 시작될 것이고, 이 고요했던 시간은 기억 한편으로 밀려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 자신과 마주한다.
작은 깨달음
이런 시간이 왜 필요한지 이제는 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해진다.
비 오는 오후, 이 고요한 시간은 그런 나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것이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속삭이는 시간. 빗소리가 만들어주는 이 평화로운 순간에, 나는 다시 나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