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길
할머니는 항상 부엌에 계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언가를 썰고, 볶고, 끓이셨다. 그 모든 동작이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칼질하는 소리, 프라이팬과 주걱이 부딪히는 소리, 냄비 뚜껑 여는 소리. 그 소리들이 모여 할머니만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어린 나는 할머니 옆에서 그저 지켜봤다.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할머니가 요리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가끔 심부름을 하거나, 간단한 일을 도왔다. 파 다듬기, 콩나물 씻기, 계란 풀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배운 것은 레시피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요리를 가르쳐주신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하면 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 말씀을 하신 적도 없다. 그저 당신의 일을 하실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요리하는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을.
부엌이라는 공간
할머니의 부엌은 넓지 않았다. 3평 남짓한 작은 공간. 하지만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오래된 냄비들, 손때 묻은 도마, 무뎌진 칼. 새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창문 옆에는 작은 화분들이 있었다. 상추, 깻잎, 고추. 필요할 때마다 따서 쓰셨다. 신선하고 좋지, 라며 웃으시던 할머니.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할머니만의 철학이었던 것 같다. 필요한 만큼만, 직접 키운 것으로.
냉장고는 작았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너무 작았다. 하지만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밑반찬, 김치, 장아찌. 할머니는 자주 장을 보지 않으셨다. 대신 한 번 장 보면 여러 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두셨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그 정갈한 모습에 감탄했다. 모든 반찬이 예쁜 그릇에 담겨,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맛의 비밀
좋은 재료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정성이란다. 누구를 위해 만드는지 생각하면서 요리해야 해. 그래야 음식에 마음이 담긴단다.
할머니가 하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어린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성이 무슨 맛을 내나? 그냥 재료가 좋고, 양념이 적당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안다. 할머니의 음식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같은 레시피로 만들어도 할머니 손맛이 나지 않는 이유를.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의 문제였다.
할머니는 계량컵을 쓰지 않으셨다. 손맛으로, 눈대중으로 모든 걸 해내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맛은 항상 일정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지금도 의문이다. 수십 년의 경험? 타고난 감각? 아니면 정말 할머니가 말씀하신 그 정성?
한 번은 물어본 적이 있다. 어떻게 재지도 않고 맛이 똑같아요? 할머니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몸이 기억한단다. 몇 번이고 해보면, 손이 알아서 움직여. 그리고 맛을 보면 알아. 뭐가 부족한지, 뭐가 더 필요한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요리는 과학이기도 하지만, 예술이기도 하다. 정확한 계량도 중요하지만, 감각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감각은 경험에서 온다.
대화의 시간
부엌은 우리의 대화 공간이었다. 감자를 깎으며, 콩나물을 다듬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때론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손은 움직이지만, 입은 쉬지 않았다.
할머니는 좋은 청취자였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다. 중간에 끊거나, 훈계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다. 그저 들어주셨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시거나, 그랬구나, 하며 공감해 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어떻게 할아버지를 만났는지,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는 어땠는지. 매번 듣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싫증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목소리, 표정, 손짓. 그 모든 것이 이야기의 일부였다.
그 시간들이 지금 생각하면 가장 소중한 추억이다. 요리를 배운 것보다, 할머니와 함께한 그 시간 자체가. 요리법은 인터넷에 찾아보면 나온다. 하지만 할머니와의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계절의 맛
할머니는 계절을 요리하셨다. 봄에는 냉이, 달래, 두릅. 여름에는 오이, 호박, 가지. 가을에는 버섯, 고구마, 밤. 겨울에는 무, 배추, 시금치. 그 계절에 나는 것으로 음식을 만드셨다.
제철 음식이 제일 맛있고 몸에도 좋단다. 자연이 주는 대로 먹으면 돼.
지금은 사시사철 모든 채소를 살 수 있다. 겨울에도 수박을 먹고, 여름에도 딸기를 먹는다. 하지만 그 맛은 다르다. 계절을 벗어난 음식은 어딘가 억지스럽다.
할머니의 부엌에서는 계절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이 오면 냉이 된장국, 여름이 오면 오이냉국, 가을이 오면 송이버섯전, 겨울이 오면 시금치나물. 그 음식을 먹으면 계절이 느껴졌다. 아, 이제 봄이구나. 여름이 왔구나.
전해지는 것
이제 나도 가끔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을 만든다. 레시피는 없지만, 손이 기억한다. 할머니의 손길이 내 손으로 이어진다. 완벽하지는 않다. 할머니 맛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하다. 그리고 만드는 동안, 할머니가 떠오른다.
감자를 깎다가 문득 생각한다. 할머니도 이렇게 깎으셨지. 파를 썰다가 생각한다. 할머니는 더 빨랐는데.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맛을 본다. 뭔가 부족하다. 뭘까. 아, 다시마 육수. 할머니는 항상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내셨다.
요리를 하면서 할머니를 배운다. 살아계실 때는 몰랐던 것들을. 왜 이렇게 하셨는지, 저렇게 하셨는지. 하나하나 이해가 된다. 그리고 후회한다. 더 많이 물어볼 걸. 더 많이 배울 걸.
하지만 후회만 하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충분히 많은 것을 남겨주셨다. 레시피가 아니라, 태도를. 음식을 대하는 마음, 사람을 대하는 마음. 그것이 진짜 유산이다.
이어지는 기억
언젠가 내게도 손주가 생기면, 함께 부엌에 설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처럼, 옆에서 지켜보게 할 것이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감자를 깎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만들며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요리를 할 때, 나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지금 할머니를 떠올리듯이. 그렇게 기억은 이어진다. 부엌에서 부엌으로,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할머니, 감사합니다. 맛있는 음식도 감사하지만, 더 감사한 것은 함께한 그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저를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