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손님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킨다. 서점은 30분 후면 문을 닫는다. 대부분의 손님이 떠나고, 이제 나를 포함해 서너 명만 남았다. 낮에는 북적이던 이곳이 지금은 도서관처럼 조용하다.
일부러 이 시간을 택했다. 서점을 제대로 즐기려면 사람이 적어야 한다. 낮에는 사람들에게 치이고, 시끄러운 대화 소리에 집중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롯이 책과 나만의 시간.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낮과는 다른 고요함. 책 냄새와 은은한 조명만이 공간을 채운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이 정적을 깨고 싶지 않아서.
오늘은 특별히 살 책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냥 책 사이를 거닐고 싶었다. 서점에는 두 가지 방문 방식이 있다. 목적을 가지고 오는 것, 그리고 그냥 오는 것. 오늘은 후자다.
책장 사이의 세계
문학 코너를 지나 인문 코너로 들어선다. 철학, 역사, 사회학. 두꺼운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어떤 책은 새것처럼 깨끗하고, 어떤 책은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다.
손끝으로 책등을 훑으며 걷는다. 제목을 읽다가 흥미로운 것이 있으면 멈춘다. 책을 빼서 뒷표지를 읽고, 목차를 훑어본다. 첫 페이지를 펼쳐 문체를 확인한다. 마음에 들면 옆구리에 끼고, 아니면 다시 꽂아둔다.
이렇게 서점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벌써 20분이 흘렀다. 아직 시간이 있다. 천천히 더 둘러본다.
책과의 만남
무심코 손을 뻗은 책 한 권. 낡은 표지, 바랜 글씨. 중고책 코너다. 누군가 오래전에 읽었을 이 책이 지금 내 손에 있다. 책 안쪽에 이름이 적혀 있다. 김민수, 2003년 3월. 20년도 더 된 책이다.
첫 페이지를 펼친다. 연필로 밑줄 그은 문장이 보인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 누군가에게 의미 있었던 문장. 지금 나에게도 울림을 준다.
페이지를 넘긴다.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다. 책 여백에는 짧은 메모도 있다. 공감, 다시 읽기, 중요. 이 책을 읽었던 김민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이 책을 왜 중고 서점에 팔았을까. 다 읽어서? 공간이 부족해서? 아니면 이사 가면서 정리하다가?
중고책에는 이런 재미가 있다. 이전 독자의 흔적. 그 사람이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졌는지, 어떤 문장에 공감했는지 알 수 있다. 마치 타인의 생각을 엿보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와 연결된 느낌.
시간의 정지
늦은 밤의 서점은 시간이 멈춘 듯하다. 바깥의 바쁜 세상과 단절된 작은 피난처. 여기서는 오직 책과 생각만이 존재한다. 내일 해야 할 일, 오늘 못다 한 일, 그런 것들은 잠시 잊혀진다.
창밖을 본다. 거리는 여전히 붐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걷고, 차들은 쉬지 않고 달린다. 하지만 여기는 다른 세계다. 느린 세계. 생각할 수 있는 세계.
다른 손님들도 보인다.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중년 남성. 바닥에 앉아 만화책을 보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남아 있다. 집에 가기 싫어서일 수도, 정말 책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점원이 조용히 정리를 시작한다. 책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고, 불을 하나씩 끄기 시작한다. 마감 10분 전을 알리는 신호. 이제 결정을 해야 할 시간.
선택
옆구리에 낀 책들을 다시 본다. 네 권. 너무 많다. 다 사면 이번 달 책값이 또 초과된다. 두 권만 사기로 한다. 어떤 것을 고를까.
하나씩 다시 펼쳐본다. 첫 문장을 읽고, 중간을 펼쳐보고, 끝 부분도 살짝 본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결정한다. 이것과 이것.
한 권은 새 책이고, 한 권은 아까 그 중고책이다. 김민수가 밑줄 그어놓은 그 책. 20년 전 누군가의 생각을 따라가 보고 싶다.
계산대로
계산대로 향한다. 점원은 익숙한 얼굴이다. 이 시간에 자주 오다 보니 몇 번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고 책을 건넨다.
점원이 중고책을 보더니 미소 짓는다. 좋은 책이에요, 라고 말한다. 읽어보셨어요? 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대학생 때 읽었다고.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고.
계산을 마치고 책을 받는다. 작은 종이 가방에 담긴 두 권의 책. 무게가 느껴진다. 물리적 무게도 있지만, 그 이상의 무게. 앞으로 이 책들과 보낼 시간의 무게.
서점을 나서며
문을 열고 나간다. 밖은 여전히 시끄럽다. 차 소리, 사람들 대화 소리. 서점 안의 정적과 대조적이다. 잠시 멈춰 서서 적응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가방 속 책을 만져본다. 오늘 밤의 작은 선물. 집에 가서 읽을 것이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그리고 김민수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갈 것이다.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와 대화하듯.
서점을 뒤돌아본다. 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다. 내일이면 다시 불이 켜지고,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늦은 밤에 올 것이다. 이 고요함을 즐기기 위해. 서점은 낮에도 좋지만, 밤에는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