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리
발걸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가을이 되면 늘 이 소리를 들으러 공원을 찾는다.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일부러 낙엽을 밟으며 걷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도보로 15분 정도. 가을이 되면 그 길이 온통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였다. 친구들과 누가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시합하듯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그저 재미있어서, 낙엽 밟는 소리가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 3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한 시간 넘게 걸리곤 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늦냐고 잔소리하셨지만, 나는 다음 날도 똑같이 늦게 집에 돌아갔다.
지금도 그 길을 가끔 지나간다. 길은 그대로지만,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작은 슈퍼는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로수만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여전히 노란 잎을 떨군다.
색의 변화
초록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붉은색으로. 나뭇잎은 떨어지기 전 가장 아름다운 색을 보여준다.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생을 마감하기 전,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이 변화를 지켜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잎사귀들.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으로 땅에 내려앉는다. 어떤 잎은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내려오고, 어떤 잎은 곧장 아래로 떨어진다. 같은 나무의 잎이지만, 떨어지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떨어진 잎들은 땅에 쌓인다. 빨강, 노랑, 주황, 갈색. 자연이 만든 팔레트. 사람들은 그 위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나도 스마트폰을 꺼내 몇 장 찍어본다. 하지만 사진으로는 이 순간의 느낌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바람의 온도, 낙엽 밟는 소리, 공기의 느낌. 그 모든 것이 합쳐져야 비로소 가을이다.
어떤 사람들은 낙엽을 쓸어 담는다. 깨끗한 공원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나는 낙엽이 쌓인 길이 더 좋다. 그 무질서함, 자연스러움이 좋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
시간의 흐름
계절은 돌고 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고, 다시 가을이 온다. 변함없는 이 순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나이 들어간다. 매년 같은 계절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 밟던 낙엽길을 지금도 걷는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마음으로. 더 천천히, 더 깊이 이 순간을 느끼며. 예전엔 그저 재미로 밟던 낙엽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계절의 순환, 시간의 흐름, 삶의 유한함.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작년 이맘때는 무엇을 했을까. 재작년은. 10년 전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각 시점마다 다른 고민, 다른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공원을 찾았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 작은 루틴이 나에게는 중요하다. 일 년에 한 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10번? 20번? 30번? 알 수 없다. 하지만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느낄 수 있을 때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당연한 것은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가을
공원에는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각자의 이유로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조깅하는 사람, 산책하는 커플, 벤치에서 책 읽는 노인, 아이와 노는 부모. 모두 가을을 즐기는 방식이 다르다.
어린 아이가 낙엽 더미에 뛰어든다. 부모는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 모습을 보니 어릴 적 내가 생각난다. 그때 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이의 즐거움을 보며 행복해했을까.
노부부가 천천히 걷는다. 손을 잡고, 말없이. 그들에게 가을은 어떤 의미일까. 함께 보낸 수십 번의 가을. 각각의 가을마다 추억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가을, 아이를 키우던 시절의 가을, 이제 둘만 남은 가을.
지금 이 순간
가을은 짧다. 금방 겨울이 올 것이다. 낙엽은 모두 떨어지고, 나무는 앙상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새 잎이 돋아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더욱 이 계절을 붙잡고 싶다.
낙엽 밟는 소리, 선선한 바람, 따뜻한 햇살. 이 모든 것이 지금만의 것이기에. 다음 주쯤이면 더 추워질 것이고, 낙엽도 대부분 떨어질 것이다. 가을의 절정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오늘도 공원을 걷는다. 낙엽을 밟으며, 과거와 현재 사이 어딘가에서 작은 위안을 찾는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가을은 나에게 그런 계절이다. 돌아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계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낙엽을 밟는다. 바스락, 바스락.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듣던 그 소리. 혼자지만 외롭지 않다. 기억이 함께하니까. 그리고 내년 가을에도, 또 이 길을 걸을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기대하며 걸음을 옮긴다.